공자 평전

공자 평전

  • 자 :천웨이핑
  • 출판사 :미다스북스
  • 출판년 :2010-04-21
  • 공급사 :(주)북큐브네트웍스 (2010-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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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회 문화사상사(史)에서 영향력 1위의 인물로 꼽을 수 있는 사람, 공자의 참 모습과 생애에 대한 최초의 본격 전기.

- 예순을 넘긴 전쟁영웅 공흘이 세상사람들로부터 "야합"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꽃다운 열일곱 처녀 안징재와 두 번째로 결혼하여 태어난 사람, 공자의 참모습.

- 세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열일곱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보내고 난 뒤 쇠락한 가문과 예악이 붕괴한 노나라의 영광을 위해 일생을 헌신한 한 인간의 장엄하면서도 서글프고 찬란한 생애.

- 동양 2천5백 년 역사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미친 유가사상의 본질과 역사에 대한 심층적이면서 체계적인 분석과 정리.





공자는 누구인가



공자에게 따라붙는 수식어는 많다. 4대 성인, 인류가 낳은 가장 위대한 스승 등. 그러나 공자는 가르치는 일을 주업으로 했고, 박학하고 재능이 많았으나 뜻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그야말로 서민에 불과했던 사람이다. 세파에 시달리고 온갖 풍상을 겪느라 이마에는 주름이 새겨졌고, 언제나 사람들을 교화하느라 눈은 지혜로 충만하지만 피로화 서러움이 역력히 묻어났다. 그러나 먼 미래를 향한 낙관적인 열정으로 인자한 미소를 짓던 사람. 끝없이 정치적 진출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좌절하고 낙망하여 교육사업에 일생을 투신한 사람. 그 결과 2천5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인류가 낳은 가장 위대한 성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는 사람이다.





춘추시대의 특성 - 생산략의 확대로 교육문화사업에 전념하는 사계층 등장



공자가 살던 춘추시대는 주례를 대표하는 문화전통이 빠른 속도로 몰락해가던 시기였다. 사회경제적으로는 새롭게 일어난 봉건제가 낡은 노예제를 서서히 대신해가는 사회적 격동기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대변동의 와중에 원래 존재하던 노예제 사회의 주례문화 전통이 점차 몰락하는 것은 시대적 대세였다. 이때 공자가 주례문화의 대표적 전통과 '극기복례'라고 하는 전통적이고도 원칙적인 이상의 완벽한 실현을 꿈꾸었으니 현실 정치의 두터운 벽에 부딪쳐 쓰디쓴 좌절을 맛보았던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공자의 교육 - 행단강학과 유가의 형성



몰락한 귀족 가문의 영광을 회복하고 '극기복례'라는 정치적 이상 실현을 일생동안 추구했던 공자였지만 그가 만고불변의 업적을 남긴 것은 교육과 저술 분야였다. 공자가 서른 살 무럽에 육예를 초월하고 육경에 정통하자 제자 되기를 간청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때 공자는 집안의 작은 뜰에 강단을 세웠다. 강단의 주변에는 은행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이 나무에 은행이 많이 열렸는데, 이는 온 천하에 그의 제자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공자의 행단강학, 그의 선생으로서의 생애가 시작되었다. 이른바 공문십철이라 일컬어지는 제자를 비롯하여 후대 유가사상을 형성한 수많은 제자들이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아울러 춘추시대 후기에는 철기의 사용과 우경의 확대로 사회적 생산력이 향상되었다. 이것은 문화교육사업을 사계층이 전문적으로 담당할 수 있는 조건으로 작용했다. 당시 마른 고깃 조각 열 묶음만 내면 공자의 문하에서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공자는 손쉬운 입학과는 달리 "썩은 나무로는 조각을 할 수 없고 더러운 흙과 같은 담벼락엔 칠을 할 수 없다"며 굉장히 엄격하고 냉정한 교육을 실시했다.





공자의 저술 -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헌 정리가



끝없는 정치적 좌절 속에서 공자는 만년을 저술사업에 매진하였다. 춘추, 시, 서, 예, 악, 역 등 대부분의 고대문헌을 정리하고 편찬하였다. 또한 동양 역사상 최초의 편년체 역사서라고 할 수 있는 [춘추]를 집대성하였다. 그는 "후세 사람 누군가 나의 이상을 이해한다면, 그것은 내가 춘추를 정리했기 때문이다. 또한 후일에 누군가가 나를 질책한다면 그 역시 춘추 때문이"라고 하였다. [춘추]는 사상 최초의 천문 기상서이자 편년채 사학의 전범이 되기도 했다.





공자와 고대 중세 근대 현대



공자와 그의 사상은 공자 사후에 추앙과 칭송을 받았다. 한나라 무제는 오경박사를 설립했고, 한선제는 유가 경전 표준본을 전국에 반포했으며, 한원제는 공자에게 작위와 봉록을 수여했다. 이후 왕조가 바뀔 때마다 공자와 유가사상은 점점 더 독존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종교교리화하고 허례허식이 늘고 번잡화되는 폐단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 와중에 중국사람들은 도가나 불가로 눈을 돌려 사상적인 균형을 취하려고 했다. 한편 공자의 유가사상은 법가 묵가 도가 등을 비롯한 수많은 사상들과의 논쟁 속에서도 지배적인 사상으로 중심을 잡아갔다.



반면 공자사상은 근대사상의 격동 속에서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킨 홍수전으로부터 패위가 깨지는 처지로 전락하고 이후 근대 선문화 운동가들로부터 배공무성(공자를 배척하자! 성인은 없다)이라는 기치 아래 집중적인 공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 진독수와 이대조 등의 시대적 비판을 거쳐 현대 중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공자의 윤리 도덕의 기준과 이성주의 원칙에서 실제로 민주주 의와 과학의 요소를 발견하였다. 예컨대 유소기는 유가의 충서지도와 자아수양의 주관적 노력에 주안점을 두고, 사실상 마르크스주의와 유가의 이성적 자각원칙을 결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공자와 동양 그리고 한국



공자와 그의 사상적 영향은 중국은 물론 베트남, 일본, 그리고 한국으로 퍼져나갔다. 한국은 조선시대에 들어 아예 유교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유학사상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서학이 들어오고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 지배를 거치면서 유교의 사상적 전통이 몰락하다시피 하고 박정희 정권에 이르러 유교의 부활을 꾀했으나 사실상 그것은 본질적인 유교가 아니라 서양적 실용주의에 입각한 다른 사상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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