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헤어지자!
...모든 이별이 식욕을 앗아가는 건 아니다.
그러나 내 몸의 일부였던 사람이 떨어져나가는 순간, 나는 참을 수 없이 끔찍한 허기를 느꼈다. 배가 고팠다. 일분일초가 허기졌고, 굶주린 짐승처럼 먹지 않으면 뱃속에서부터 눈물이 차올랐다. 그러니까 나는 먹어야 했다. 먹고, 먹고, 또 먹어서 이 끔직한 허기를 잠재워야 했다. 그것이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이별법이었다.
부실한 몸뿐 아니라 허한 마음을 채워주는 것도 일단은 음식부터일까. 삼 년 사귄 애인과 이별을 하고, 평소 밉보이던 상사에게 꾸지람을 듣고, 오랜 친구와 별것 아닌 일로 다투고, 부모님의 시집 가라는 잔소리를 듣고…… 우리는, 일단, 먹는다.
일단은 기름기가 필요하다. 기름기를 쫙 빼고 구웠다는 새로 나온 치킨은 무슨, 기름에 바싹 튀긴 프라이트치킨을 배달 주문하곤, 치킨이 배달되어 올 때까지 500㎖짜리 아이스크림 한 통으로 당장의 허기를 달래본다.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치즈가 박힌 소시지 두 개와 비스킷 한 봉지쯤, 그리고 차가운 콜라 1.5ℓ짜리를 준비한다. 그쯤 되면, 딩동!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거다. 내일 아침 걱정은 잠시 미뤄둔다.
최근 시작한 리얼리티 다이어트 프로그램 출연자들의 프로필을 살펴보면 대략 이렇다.
최이슬. 에어로빅 강사, 씨름왕. 164cm. 92.5kg
이하얀. 탤런트. 174cm. 68kg
주서정. 법무법인 직원. 173cm. 101.5kg
송정희. 북아트 디자이너. 160cm. 90.7kg
전직 요리사, 리틀 미스코리아 출신, 대학생, 간호사……
12명의 출연자들은 8주 동안 그야말로 ‘전쟁’에 돌입한다.
이 전쟁의 승자는 최대 감량자이다.
‘시즌3’를 이제 막 선보인 이 프로그램의 원조는 2004년 미국 NBC에서 시작한 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많이 잃는 자, 패자가 되어야 하는 loser가 최종적인 winner가 되는 이 프로그램은 2009년 1월 ‘시즌7’까지 방영되었고, 연예인들이 참가하는 유사프로그램이 따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보름달 같은 뽀얀 얼굴과 적당히 살이 오른 허벅지의 ‘부잣집 맏며느릿감’이, 두두룩한 뱃살과 기름기 흐르는 얼굴의 ‘사장님’들이 인기있던 시절은 한참 전에 지나갔다.
인스턴트식품으로 하루 세끼를 때우고 자기 관리할 시간도 경제적 여유도 없는 이들이 애인을 잃고 직장을 잃고, 그러면서 체중이 늘어갈수록, 웰빙음식을 챙겨먹으며 경제적 시간적 그리고 정신적으로 여유를 누리는 남녀들은 점점 더 마른 몸매를 자랑한다. 깡마른 몸매가 유행하고 거식증으로 사망하는 모델들이 생기면서 유럽의 나라들은 체질량 지수 18 이하인 모델들이 나오는 광고를 규제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고도 하나, 눈 씻고 찾아봐도 TV와 패션잡지, 이런저런 신문광고에는 여전히 깡마른 모델들뿐이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나가지 않아도, 우리는 하루 스물네 시간, 전쟁중이다. 대한민국 표준 몸무게 여성의 대부분은 자신이 뚱뚱하다고 생각한다. 깡말라 쇄골에 물이 고이고 얇은 옷 위로 등뼈 마디가 다 드러나는 여성들 중에는 폭식과 거식을 번갈아가며 방 안에서 나오지 않는 이들이 있다.
무엇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먹고 또 먹고, 그리고 또 뱉어내게 하는 것일까.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생활의 달인> <도전 신데렐라> <다큐 스페셜>… 각종 오락프로그램, 다큐멘터리, 리얼리티 도전 프로그램들의 가장 큰 공통 주제는 무엇일까. 그들이 가장 관심을 갖고, 사람들이 가장 보고 싶어하는 건 무엇일까. 의심의 여지없이 다이어트다. 뚱뚱한 여자가 두꺼운 코트를 벗듯 자신의 살들을 훌훌 털고, 극적으로 날씬해진다?
이른바 21세기 최고의 석세스 스토리는 다이어트 성공기가 된 것이다.
에르메스와 샤넬 같은 명품 브랜드의 로고가 아드레날린 수치를 최대치로 올리는 시대. 눈에 보이는 이보다 더 드라마틱한 성공은 어디에도 없다.
‘다이어트 여왕’의 탄생은 그것으로 하나로 현상이 되고, 자본주의 최고의 상품이 된다. 그들은 before, after 사진을 증명사진 찍듯 남기고, 기념비적으로 커다란 예전의 옷들은 추억의 앨범사진처럼 옷장에 소중하게 걸어 놓는다. 바야흐로 새로운 신데렐라의 탄생. 하지만 이런 의문들이 남는다.
40킬로그램을 감량했던 왕년의 다이어트 여왕들은 지금도 여전히 날씬할까? 그 누구도 비켜갈 수 없다는 무시무시한 요요현상의 제물이 된 건 아닐까? 혹시 거식증에 걸린 건 아닐까? 혹시 폭식증? 아니, 여전히 최고의 퀸카, 말 그대로 신데렐라가 되어 자신의 번쩍이는 유리구두를 세상에 멋지게 전시해야지.
누군가는 살이 찌고,누군가는 살이 빠지고, 누군가는 실패하고, 누군가는 성공한다
삼 년간 사귄 정민의 이별 통보 후, 연두는 그의 빈자리를 엄청난 양의 눈물과 아이스크림으로 채운다. 어느새 98.3킬로그램까지 몸무게가 늘어난 연두에게, 방송작가이자 내게 정민을 소개해줬던 친구 인경은 이참에 살을 빼라고 권한다. 정민이 나와 헤어진 후 예전 여자친구에게 매달렸고, 다시 사귀게 되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지금까지 사귀었던 세 명의 남자가 모두 나와 헤어진 후 이전 여자친구에게로 돌아갔다는 사실은, ‘여자’가 아닌 ‘유능한 요리사’가 되기 위해 건장해져야만 했던 내 지난날을 무너뜨린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변화, 그리고 나 자신에게 집중하기 위한 절대적인 시간. 그래서 나는 등기우편으로 지금까지 일했던 레스토랑에 사표를 보낸다. 그리고 가장 건강한 방법으로 살을 많이 뺀 사람이 우승자가 되는 <다이어트의 여왕>이라는 프로그램에 나가기로 한다.
미션 수행 여부에 따라 탈락자를 결정하는 방식으로 인해 참가자들은 타인에 대한 예의와 배려를 점점 잊어간다. 살아남기 위한 전략적 우정, 전략적 증오심, 질투와 모략 속에서 최후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그리고 그녀는 끝까지 ‘여왕’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날씬해지고 싶고 행복해지고 싶은 0.1톤 그녀들의 이유 있는 반란,
2009년 여름, 리얼리티 쇼보다 더 hot한 리얼 다이어트 프로젝트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