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물차 기사·형틀 목수·용접사·철도차량정비원·먹매김 노동자·
건설현장 자재정리 반장·주택 수리 기사·
자동차 시트 제조 공장 노동자·레미콘 기사·빌더 목수”
소매 걷어붙이고 근력 다져가며 ‘험한 일’ 하는
자부심으로 살아온 여성 10인 인터뷰집
여기, 책상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거나 서비스직에서 일하는 대신 ‘노가다’라 불리는 현장에 뛰어든 여성들이 있다. 《나, 블루칼라 여자》는 화물차 기사·용접공·목수·철도차량정비원·주택 수리 기사 등 남성들만 가능할 것 같았던 직군에서 온갖 차별을 겪으면서도, ‘험한 일’ 해내는 자부심으로 살아온 멋진 언니들의 삶과 사연을 들여다본다.
〈프레시안〉 사회부 기자인 저자는 지난해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블루칼라 여성 노동자 10인을 만났다. 35도를 육박하는 폭염 아래 아파트 건설현장에 포대를 깔고 앉아 이야기를 들으며 온몸이 땀으로 젖기도 했고, 분진이 휘날리고 중장비 소음으로 시끄러운 현장에서 서로에게 고함치듯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기도 했다. 담배 냄새가 가득한 현장 사무실에서 기침을 하며 인터뷰하기도 했고, 레미콘차 기사와 좁은 골목과 비포장도로를 달리며 레미콘 운반 ‘두 탕’을 함께한 적도 있었다.
이처럼 《나, 블루칼라 여자》는 여성 10인의 인터뷰를 토대로 지금까지 기록으로 존재하기 어려웠던 다양한 스펙트럼 속 여성 베테랑 노동자들의 삶을 생생하게 들려준다. 인터뷰이와의 현장감 넘치는 대화에 더불어 황지현 작가의 사진들은 이들의 직업과 노동 환경을 더욱 생동감 있게 포착한다. ‘먹매김 노동자’ ‘형틀 목수’ ‘빌더 목수’ 등 생소한 직업군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것도 책을 읽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그들이 자신의 일터에서 고군분투했던 이유는 일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계속 일하기 위해서였다. 생존이 곧 투쟁이었던 셈이다. 자신의 노동에 관해 이야기하던 그들의 눈빛은 살아 있었다. 햇볕에 얼굴이 다 타고 땀에 절었어도, 주름이 깊게 패고 먼지로 뒤덮여도 자신의 노동에 관심을 갖고 그 이야기를 들으러 온 여자 기자에게 그들은 너무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 돈이 필요해서 일을 시작했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자부심을 갖고 일한다고, 항상 주눅 들어 살다가 일하면서 새로 태어난 것 같다고 말하는 그들의 눈에서 빛이 났다.”
“우리는 여자가 아니라 한 사람의 기술자입니다”
힘 좀 쓰는 언니들의 프로페셔널한 기술의 세계
경력이나 기술이 없는 여성들은 일자리조차 구하기 힘든 세상. 10인의 블루칼라 여성들은 일터에서 당당하게 커리어를 이어올 수 있었던 자신만의 ‘서글픈’ 생존 노하우를 들려준다. 철도차량정비원인 하현아는 ‘남성들의 험한 세계’에서 여성의 몸으로 일하며 여성성을 애써 지우려 했다. ‘여자라서 배려받는’ 상황이 올 때면 몹시 자존심이 상해 힘들어도 절대 힘들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무리하게 혼자서 철도 ‘입환 작업’을 하다가 온몸이 멍투성이가 된 적도, 기차 먼지와 기름으로 범벅이 된 적도 있었다. 건설현장 자재정리·세대청소 작업반장인 권원영도 자신이 여자인 탓에 팀원들까지 부당한 상황에 처할까봐 일부러 현장에서 거칠게 자신을 드러내고 남들이 쉬는 시간에도 바닥에 한 번도 앉지 않고 계속 ‘빡세게’ 일했다. 여자라는 정체성이 편견이 되지 않기 위해 하루하루 인내했다.
화물차 기사 김지나는 자신이 여성인 게 좋고 숨길 수도 없다고 생각하여 ‘내가 낸데(내가 나인데)’ 정신으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며 차별과 싸웠다. 남들이 ‘형’ ‘형님’으로 동료를 호칭해도, ‘내가 여자라는 건 변하지 않는데 왜 남자를 형이라고 불러야 하나’ 하는 생각에 ‘오빠’ 소리를 고집하기도 했다. 레미콘 기사 정정숙은 여성들 중에서도 작은 몸집으로 커다란 레미콘차를 몰기 위해 온몸에 힘을 실어 큰 핸들을 안아 돌리기도 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후진 기술을 터득하기도 했다. 남성들조차 아무도 나서지 않는 부당한 상황에서 홀로 투쟁하여 모두의 안전을 지킬 수 있는 노동 환경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남성조차 버티기 힘든 직군에서
일하는 재미로 살아온 블루칼라 여자 생존기
물리적인 힘이 필요한 건설현장 직군인 빌더 목수 이아진과 용접사 신연옥은 남성에 뒤지지 않는 1인분의 몫을 해내기 위해 퇴근 후 운동을 하며 알짜근력을 키웠다. 그 덕에 이전에는 들기 어려웠던 40∼50킬로그램짜리 현장 자재들을 가뿐하게 들어 올리게 됐다. 20대 이아진은 블루칼라 노동을 ‘노가다’라 폄하하는 편견을 깨뜨리기 위해 자신의 유튜브 채널과 SNS를 통해 직업을 얼마나 사랑하고 하루하루 즐겁게 일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50대 신연옥은 배관 파이프만 보면 그렇게 반갑고, 현장마다 냄새가 다르며 출근하는 길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20년 동안 식당 찬모로 일하다 생활고로 ‘먹줄 일’을 시작했던 김혜숙은, 콘크리트 바닥에 먹실을 튕겨 도면을 그려 건축물의 기초를 닦는 먹매김 베테랑이다. 처음에는 건설현장에서 은어처럼 쓰이는 용어조차 몰라 작업반장에게 심한 욕을 듣기도 하고 같이 일하는 동료에게 성희롱을 당하기도 했다. 이제는 그렇게 모멸감을 참아가며 쌓았던 자신만의 노하우와 기술을 현장에서 후배 여성 노동자들에게 알려주며 그들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자동차 시트 도장팀에서 일하는 황점순은 ‘공순이’라 무시당하면서도 하루 12시간씩 일하며 야간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냈고, 결혼한 뒤에는 아이 둘을 키우며 25년을 일했다. 그는 오래 일하기 위해서는 ‘자존심보다는 자부심’을 갖고 일해야 한다고 말한다.
주택 수리 기사 안형선은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을 계기로 여성들이 안전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 싶어 2018년 1인 여성 가구 주택 수리 서비스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여성 수리 기사를 구하고 싶어도 ‘0명’이었던 현실 탓에 그가 직접 기술을 배워 수리 기사로 일하고, 이 일에 종사하고 싶은 여성들에게 기술 교육을 하며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특징적인 부분은 여성 노동자들이 그저 현장에서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해 대부분 노조에 가입했다는 점이다. 이들에게 생존은 곧 투쟁이었다. 노조에 들어간 뒤로는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해오던 사무실 청소를 하지 않게 되었고, 성희롱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노조의 도움을 받아 떳떳하게 불쾌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들은 그저 먹고살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일뿐인데 정부가 자신들을 ‘건폭’으로, ‘귀족 노조’ ‘정치 노조’로 매도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결같은 목소리로 말한다.
“처음에는 회사에서 내 몫을 못할까봐 출근하면서부터 긴장했어요.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야간작업 중에 열차 칸끼리 붙이고 떼는 작업을 ‘입환 작업’이라고 하는데, 어떤 날에는 혼자 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쪽의 입환을 못 하면 다른 동료가 또 와야 하니까, 그렇게 안 하려고 온몸으로 달라붙어서 무게를 실어서 옮겼어요. 몸 무게로 힘을 실어서 하다 보니, 정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기차의 먼지와 기름에 범벅이 된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야지만 버틸 수 있었어요.”
“친구가 노조 가입을 권유해서 건설노조에 가입했습니다. 들어와보니 더 안전하게 일하게 되어서 좋아요. 여자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키지도 않고 ‘먹 아줌마’가 담당하는 현장 관리소장 사무실 청소도 하지 않아요. 정부가 건설노조를 탄압하는 건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일하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여름이면 땡볕에서 일하고 겨울이면 눈 맞고 일하는 한 사람일 뿐입니다. 건설노조라고 하지만 다 일하는 서민입니다. 현장에서는 애꿎은 사람들만 피해를 보고 있어요.”
“여자는 어디에나 있다. 당신이 상상할 수 없는 곳에,
당신이 상상한 모든 곳에”
블루칼라 여성 노동자들의 레퍼런스이자
삶에서 분투하는 모든 이를 위한 책
블루칼라 노동 현장은 남성 노동자들에게도 팍팍하고 사람대접 못 받는 경우가 허다한 곳이다. 하물며 여성들은 때론 불꽃이 눈앞으로 튀고, 온몸에 피멍이 들기도 하고, 레미콘차 안에서 몇 시간을 꼼짝없이 보내면서도 남성들의 임금에 훨씬 못 미치는 급여를 받아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화장실이 부족한 현장에서 여자 화장실은 먼 곳에 하나뿐이어서 하루 종일 물도 마시지 않고 일하는 날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중 가장 험난했던 건, 함께 일하는 남성들의 편견과 배제였다. 똑같이 생계를 위해 일하러 나온 건데 ‘차라리 식당 일을 하지 왜 이렇게 험한 일을 하러 나왔냐’고 걱정하는 이도 있었고, ‘남자가 하는 일을 여자가 하면 남자들은 어디 가서 먹고사느냐’며 따지는 이도 있었다. 여성 노동자를 동료로서가 아니라 ‘여자’로 취급하며 ‘선 넘는’ 행동과 성희롱으로 정신적인 괴로움을 주었던 이들도 있었다. 대부분 여성을 ‘동료’로 마주한 적이 없었던 남성 동료들의 반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루칼라 여성들은 일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계속 일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인터뷰이들은 처음에는 돈이 필요해서 일을 시작했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갖고 일한다며, 항상 주눅 들어 살다가 일하면서 새로 태어난 것 같다고 공통적으로 이야기한다. 이들은 ‘여자라서 못 한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남자들보다도 1∼2시간씩 일찍 출근해 쉬지도 않고 열심히 일했다. 그제야 남성 동료들도 일에 ‘진심’인 여성 노동자들을 여자가 아닌 ‘동료’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블루칼라 현장은 전쟁터를 방불케 할 정도로 위험하고, 일도 도제식으로 배우다 보니 마초적인 문화가 익숙했던 게 현실이다. 여성 노동자 또한 없다시피 할 정도로 드물었기에 남성중심적인 문화가 지배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곳에 자리 잡은 여성들이 친구를 하나둘 데려오며 현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의 수가 꾸준히 늘고 있으며 자기 목소리를 내고 투쟁하여 조금씩 조직 내 문화도 바뀌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이 블루칼라 여성들의 레퍼런스가 될 뿐만 아니라 삶에서 분투하는 모든 이를 위한 책이 되기를 희망한다. 책을 추천한 서한나 작가의 말처럼 블루칼라 여성 노동자들이 건네는 이야기는 어디로 가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는 사람들에게, 기운이 필요한 여자들에게 앞서 경험한 이들의 해방의 순간과 용기를, 생에 대한 깊은 사랑을 전해줄 것이다.
“이런 얘기하면 동료들이 미쳤다고 하는데, 파이프(배관)를 보면 반가워요. 용접하면서 ‘내가 너를 예쁘게 떼워줄 테니까 오래오래 잘 있어’라고 최면을 걸어요. 지금도 아침에 눈을 뜨면 일하러 갈 수 있는 게 너무 좋고 새로운 현장에 가면 설렙니다. 현장마다 해야 하는 일도, 분위기도, 냄새마저도 달라요. 그래서 좋아요. ‘더 일찍 용접을 배웠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마저 듭니다.”
“일을 하다 보면 노동자 스스로도 자신을 ‘노가다’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끼리 높은 프라이드를 갖자고 공감대를 형성하고 싶었어요. 작업복도 소개하고 공구도 소개하다 보면 우리끼리 더 재미있게 공감하고, 또 이 일을 바라보는 제 자신의 시선도 바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먼저 걸어온 사람들의 문화는 쉽게 바꿀 수 없겠지만, 저 같은 사람들을 늘리는 게 맞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