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나보다 더 ‘살아 있는’ 것은 지금껏 내가 ‘쓴 것’들일 것이다!”
지금, 그리고 여기, 언제나 현재로 살아 있는 젊은 소설, 김영하 신작 소설집
“언젠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햄릿이라는 인물이 비현실적이라는 한 독자의 질문에, “이보게, 젊은이. 햄릿은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자네보다 훨씬 더 살아 있네”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 대목을 읽다가 문득, 나라는 인간과 내 소설의 관계 역시 그와 비슷하지 않은가 돌아보게 되었다. 지금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나라는 존재는 어지러이 둔갑을 거듭하는 허깨비일지도 모른다. 그보다 더 “살아 있”는 것은 지금껏 내가 쓴 것들일 것이다. 그 책들이 풍랑에 흔들리는 조각배 같은 내 영혼을 저 수면 아래에서 단단히 붙들어주는 것을 느끼곤 한다.”_김영하
‘지금-여기’의 새로운 세대, 가장 젊은 감각을 대변하는 작가 김영하가 신작 소설집을 들고 돌아왔다. 그사이 『빛의 제국』과 『퀴즈쇼』 같은 장편들을 꾸준히 선보여왔으나, 언제나 가장 현재적인 감성, 가장 도시적인 이야기로 무장한 단편소설로는 『오빠가 돌아왔다』(창비, 2004) 이후 육 년 만이다.
무엇보다, 이번 신작 소설집에 실린 단편들은 대개가 문예지의 청탁 없이, 작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들을 ‘먼저’ 쓴 소설들인데다, 그중 몇 편은, 어떤 지면을 통해서도 선보인 적이 없는 미발표작들로, 그의 단편들을 기다려온 독자들에겐 더욱 신선한 선물이 될 것이다.(오랜 시간 문예지 등에 발표된 것들을 묶는 기존의 단편집과 비교해보면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원고료도 없는 글을, 오직 쓰는 것이 좋아서, 그것을 가지고 다른 이들과 교감을 나누는 그 순간들이 좋아서, 밤을 새워 단편소설을 쓰던 날들이었다. (……) 이제는 가끔 마음이 내킬 때면 가벼운 마음으로 단편소설을 쓰곤 한다. 대체로는 청탁 없이, 마치 첫 단편을 쓸 때 그러했던 것처럼, 작곡가가 악상이 떠오를 때 그렇게 하듯, 그 순간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들을 적어나간다. 어쩌면 나는 아주 멀리 돌아 처음 시작한 지점으로 돌아와 있는지도 모른다.”_김영하
현대적 감수성과 특유의 속도감으로 일상의 결정적 단면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동시대의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던 작가의 단편들은, 이번 작품집에서 어쩌면 그 정점을 이룬다. 간결하고도 명쾌한 문장에 실려 있는 날카로운 현실인식과 유쾌한 상상력, 섬뜩한 아이러니는 이야기가 짧아진 이상으로 긴 여운을 남긴다.
작가는 이야기의 현장에서 한발, 아니 멀찌감치 물러나, ‘지금-여기’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을 ‘사건’의 한 장면을 칼로 도려낸 듯 그대로 가져와 우리 앞에 부려놓는다. 시간과 공간이 한 덩어리로 움직이는 3차원의 세계에서 2차원 평면의 세계로, 텍스트로 바뀌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그 ‘사건’은 그러나, 지금 이곳, 그러니까 도시 저쪽(혹은 이쪽)의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는 ‘일상’의 한 부분에 다름아니다.(심지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긴 한 거야, 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것까지를 포함하여.)
확실히, 김영하의 소설은 진화하고 있다.
그의 새 소설들을 마주하고 잠시 머뭇거릴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소설 속 ‘사건’은 어느 순간, 일체의 다른 과정 없이 곧장 ‘나’의 것으로 바뀌어버린다. 때문에, 더 벌어져버린(어쩌면 새롭게 생겨난) 작가-텍스트-독자 사이의 거리에서, 새로운 이야기들은 무한대로 재생산된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놓은 그 빈 공간에서.
그렇다면, 바통은 이제 독자에게로 넘어온 것이다. 작가가 ‘가공해낸’ 이야기(와 그의 생각)에 귀를 기울이고, 감동을 받고, 작가의 감상을 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이 세상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을(그것은 그러니까, 나에게도 지금 이 순간 벌어진 혹은 언젠가는 벌어질지도 모르는) 그 ‘무.언.가.’에 대해서 생각하기.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나 외에는.
2010년, 오늘, 도시,
지금 그들에겐, 지금 우리에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