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고상/네뷸러상/영국 판타지 문학상 수상작
세상의 모든, 한때 문학소녀와 소년들을 위한 설렘 가득한 연서
“내겐 새 책이 있고, 책이 있는 한,
난 그 어떤 것도 참을 수 있다.”
“책을 충분히 사랑한다면, 책도 당신을 사랑하게 된다.”
세상 모든 책덕후들을 위한, 마법과도 같은 이야기 “카라스를 만나야 해”
만약 내 어머니가 세상을 지배하려는 사악한 마녀라면? 어머니의 음모를 저지하려다가, 쌍둥이 자매를 잃고 불구의 몸까지 된 열다섯 살 소녀는 홀로 본 적도 없는 아버지를 찾아간다. 아버지에겐 세 명의 쌍둥이 고모가 있어, 소녀를 평범한 아이로 만들어 버리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소녀는 SF와 판타지 소설에 탐닉하면서, 타인들 속에서 고독에 맞서다가 자신만의 카라스(서로 진정으로 연결된 사람들의 무리)를 만나 조금씩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마침내 마녀인 엄마와 한판 대결을 벌이는데, 그 결과는?
2012년 휴고상과 네뷸러상, 영국판타지문학상을 수상하고 세계 판타지 문학상과 로커스상에도 최종 노미네이트된 영국 웨일스 출신 작가 조 월튼의 대표작.
우리에게 판타지는 무엇일까
책을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은, 십대 시절의 한 순간만큼은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대상이란 착각을 하며 산다. 삶은 전체적으로 볼 때는 풍성하고 아름답지만, 어떤 시기엔 종종 버텨내야 할 것으로 전락한다. 그리고 책은 ‘지금 이 순간의 나’를 견디기 힘든 이들에게 삶을 지탱할 유효한 도구 중 하나다. 이 소설은 바로 그런 힘으로 십대를 견뎌내온 이들을 대변한다. 그런 탈출구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버텨본 경험이 있다면 그 대상이 무협인지 판타지인지 SF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으리라. 그렇기에 이 책은 영미권의 특수한 세대를 위한 책을 넘어서, 모든 시절의 모든 세대를 위한 책이 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여기 판타지 소설을 읽는지 그 소설을 사는지 애매모호한 소녀가 있다. 《반지의 제왕》과 《나니아 연대기》의 내용에 매우 익숙한 것처럼 보이는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마녀라고 말한다. 마녀를 쉽사리 믿지 못하는 우리는 다만 그녀의 어머니가 미쳤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녀는 자신과 그 쌍둥이 자매가 어머니에게 맞섰다가 자매 중 한쪽이 죽음의 희생을 치러야 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살아남은 쪽이 바로 자신이라고 말한다. 그 말을 믿기 힘든 우리는 다만 너희 가족들에겐 이해하기 힘든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소녀가 마법을 믿을 때 생겨나는 일들
그렇지만 그녀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한 방식은 마법이다. 그녀는 자신의 마법을 통해서야 비로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믿지 않는 이들에겐 별 거 아닐 수 있는 그런 주장이다. 사실 소녀의 말을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본질적인 차이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이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어쩌면 우리는 대답을 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마법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우리 대부분은 이런 종류의 애매한 설명이 아니면 지나치기 힘들 그런 시절을 지나쳐왔다. 우리 모두는 한때 스스로가 특수한 존재라 여겼다. 오늘날에도 아이들은, 자신들을 해리포터네 마법학교에서 불러가야 할 특수한 존재라고 믿는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다가와 “너는 사실 머글이 아니야. 나를 따라오렴...”이라고 말하기를 기다린다. 그들의 절대다수가 그 기다림에서 이득을 보지 못하겠지만, 그렇게 해서 삶을 버틸 수 있다면 그래선 안 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누구나 자신을 특수한 존재라 여기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아서 좌절하는 시대다. 이런 상황에서 〈타인들 속에서〉의 주인공인 모리는 어쩌면 자신의 특수함을 쉽게 인정받을 수 있는 조건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가령 모리는 영국의 한 지역인 웨일스의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만으로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모리는 어머니가 마녀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요정을 보고 마법을 부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자신의 특수성이 설명된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녀는 자신이 무리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도 아니라 사물을 바라보는 특수한 방식 때문에 특수하다고 생각한다.
자존감과 자기객관화 사이에서
그렇다. 이런 균형감각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결국엔 자신이 특별하다고 믿지만 어째서 특별한지에 대해선 설명을 달리하는 그런 균형감각 말이다. 사실 우리 중 상당수는 이만큼도 특별하지 않은 이유로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자존감과 자기객관화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않으면 역시 비슷한 과업에 흔들리는 타인들이 가득 찬 세상에서 길을 잃게 된다. 모리는 아직 본격적으로 세상에 합류하지 못했지만, 그러기 전에 무엇을 해야 할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외로움에 지친 주인공은 자신과 생각을 나눌 만한 사람인 ‘카라스’를 얻기 위해 무려 마법까지 쓴다. 주인공과 독자들은 이 카라스의 마법이 효과가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다만 그녀가 이 마법을 사용한 이후에 자신이 즐겨 읽었던 SF 소설에 대한 독서토론의 기회를 손에 얻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인공이 겪는, 떨쳐 내려는 외로움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사실 이 외로움은 우리에게 익숙했던 것이 아닌가? 그리고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익숙하지 않음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모리의 간절함에 비한다면 어쩌면 ‘카라스’를 얻기가 너무 쉬운 시대다. 그리 규모가 크지 않은 언어권을 살아가는 한국 사람들도 좋아하는 취향의 동료를 웹상에서 얻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즉, 이전 시대에 비한다면 우리는 누구나 카라스의 마법을 쓰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우리가 과연 많은 사람들이 원했던 ‘카라스가 있는 삶’의 충만함을 얻고 있는지는 또 별개 문제다. 우리는 우리의 ‘카라스’ 속에서 이상하게도 다시 고독을 느낀다. 그리고 이 고독 속에서 또한 매번 새로운 카라스를 꿈꾼다.
우리에게 다가온 오래된 교신
그럴 때엔 새로운 질문을 해보는 것도 좋겠다. 우리에게 판타지란 무엇일까.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고, 그걸 원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 우리는 내가 바라는 판타지를 얻기 위해 무엇을 노력하고 있고, 그 노력을 공유하는 이들은 누구일까. 나는 그들에게 어떻게 교신할 수 있을까. 모리는 이 점을 간절하게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에 SF적인 풍경 속에서 판타지를 살았고, 삶이 마법 같았으며 마법이 삶이 되는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사실은 판타지 소설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지만 정말로 판타지 소설 같다”라는 어떤 평은 그런 의미에서 적절하다. 우리 삶에 존재하는 환상과 마법은 어쩌면 현실보다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것은 교신에 대한 이야기이다. 가령 이 소설에서 저 유명한 판타지 소설가 어슐러 K. 르 귄의 한 세계관의 통신수단인 ‘앤서블’에 대한 얘기가 나올 때, 이것은 교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신기하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그 소녀가 1979년에 접했던 SF와 판타지 소설의 대부분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그 걸작들이다. 그것이 여전히 우리에게 걸작인 이유는 ‘앤서블’의 신호는 어떤 지역에는 수십 년이 지나서야 와닿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날 그들이 느꼈던 풍요를 누리며, 그 신호에 대답하지 못할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여전히 그녀에게서 ‘타인들’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작품해설
역자 후기: 타인들 속에서 타인들 속으로
열다섯 살은 미묘한 나이이다. 아이도 어른도 아니고, 책에도 사람에도 사건에도, 모든 것에 민감하게 영향받고 상처받고 위로받으며, 어떻게 살까 이전에 처음으로 어렴풋하게나마 삶의 무게를 느끼기 시작한다. 나를 이해해줄 사람은 없는 듯하고, 늘 타인들 속에서 산다는 기분이 나를 외롭게 한다. 그래서 열다섯 살로 산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그리고 이 책의 주인공인 모리는 바로 그러한 열다섯 살의 소녀이다.
책과 상상놀이를 좋아하는 모리는 정신이 이상한 어머니 때문에 쌍둥이 자매가 죽고 자신은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된 뒤 어머니를 피해 도망쳐 쉼터에 몸을 의탁한다. 그리고 곧 평생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에게 가게 된다. 모리를 어찌할 바 몰랐던 아버지와 고모들은 모리를 기숙학교로 보내고, 그곳에서 평범한 아이들과 어울려보려던 모리는 결국 실패해 좌절하다가 인근 읍내 도서관의 독서모임에서 다시 세상에 발을 디딘다. 그리고 분신과도 같던 쌍둥이 자매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이고도 혼란스런 사건을 마침내 온전히 받아들이고 자아를 찾음으로써, 쌍둥이 자매를 따라 자살하려는 유혹들을 이겨내고 쌍둥이의 반쪽에서 오롯이 자신만으로 다시 일어선다.
반년 정도의 일기로 구성된 이 소설은 전체적 줄거리만 본다면, 한 소녀가 성인의 세계로 입문하는 과정에서 내면적 갈등을 겪으며 정신적으로 성장하고 세계에 대해 각성한다는 면에서 전형적인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소설에는 다른 성장소설에 없는 독특한 부분들이 있다.
우선, 이 책에서는 SF가 모든 것의 매개체가 된다. 우리나라보다 비교적 SF와 판타지 소설의 위상이 높은 영미권에서도 이런 장르문학은 여전히 주류문학에 끼지 못하고 있으며 이런 책을 주로 읽는 독자들은 걱정스러운 눈길을 받게 된다. 그러나 모리는 지금보다도 그 위상이 더 낮았던 70년대에 SF와 판타지 소설을 읽고 그걸 정신의 자양분 삼으며 자랐고, 그래서 그런 소설을 읽지 않고 이상하게 보는 주위 사람들에게서 고립감을 느낀다. 하지만 이제 SF는 완전히 낯선 사람이나 마찬가지이던 아버지와 열렬히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주제가 되고, 기숙학교의 탈출구이던 도서관에서 만난 SF 독서모임은 모리가 다시 세상으로 연결되고 나아가는 계기가 된다. 즉, 사람보다 책을 더 소중히 여기며 ‘타인들 속에서’ 살던 모리는 SF를 통해 책 밖의 세상, ‘타인들 속으로’ 손을 뻗게 된다. 그리고 1980년에 글래스고에서 열릴 이스터콘은 이제 모리에게 세상과 만나는 희망찬 약속이 된다.
또한, 수많은 SF들이 언급되고 있긴 하지만 이 소설의 전체적 얼개는 판타지 소설이다. 모리는 쌍둥이 자매와 함께 사악한 마녀인 어머니에 맞서 세계를 구해내고 주위엔 요정과 마법이 가득하다. 그러나 이 책은 클라이맥스가 아닌, 극적인 사건들이 모두 끝난 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쌍둥이는 죽고 자신은 불구가 된 뒤 승리 이후의 상처를 수습하고 그 후의 삶을 살아가려 애쓴다는 면에서, 오히려 대하 판타지 소설의 에필로그에 가깝다. (이 책이 굳이 클라이맥스가 아닌 그 이후를 다루는 이유는 작가가 자신은 늘 ‘그 후의 이야기’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리고 (진짜로 존재할 수 있고 상상일 수도 있지만) 곳곳에 등장하는 요정들과 마법은 이질적이지 않다. 작가는 요정과 마법이 정말로 실재한다고 설득력 있게 들리길 바랐기 때문에, 거듭되는 우연의 결과라고 간단히 부정할 수 있는 마법 시스템을 창조해냈고, 자연과 융화되는 ‘유치하지 않은’ 요정을 지향했다.
그러나 소설 속 요정은 단순히 판타지 소설의 분위기를 주려는 요소로서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흑백으로 세상을 보는 어린이들이 그렇지 않은 어른보다 요정을 더 잘 본다는 모리의 말처럼, 요정은 모리가 아직 어른으로 완전히 성장하지 않았다는 상징이기도 하다. 그리고 요정들과의 여러 일화는, 분신 같은 쌍둥이가 죽은 뒤 사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정체성을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찾아오는 자살의 유혹과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치열한 노력 간의 갈등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
이런 특징들 외에도 이 책에는 많은 SF 소설들이 등장하고, 주인공이 짤막하게나마 그 책에 대한 평을 한다. 따라서 SF와 판타지 문학의 독자, 특히 본서에 등장하는 책들을 읽은 독자들이라면 이 책에 굉장한 흥미를 느낄 것이다. 하지만 많은 독자들이 이 책에 동질감을 느끼는 이유는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누구나 거쳐 가는 열다섯 살이라는 보편성 위에 SF와 판타지 소설이라는 특수성이 더해져 있다. 그래서 SF와 판타지 소설을 읽고 가슴 뛰는 경험을 하며 자란 독자들에게 이 책은 설렘으로 가득한 연서라고 할 수 있다. 독자들은 주인공 모리가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 SF와 판타지 소설을 무시하던 사람들 속에서 느낀 고립감을 다시 한 번 완벽하게 동감할 수 있을 것이며, 모리가 온갖 SF와 판타지 소설을 놓고 하는 생각들, 그리고 SF 독서모임을 통해 처음으로 자신의 자리를 찾고 세상과 소통하는 길을 찾는 모습에서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똑같이 깊은 흥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굉장히 개인적이면서 SF와 판타지 문학이라는 특수한 장르를 주제로 삼았는데도 이 책이 수많은 독자에게 “바로 내 얘기”라는 찬사와 함께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는 점에 우리가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지막으로, 모리에게 책은 힘겨운 현실에서의 도피처였을까, 아니면 흑백논리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이 세상과 현실의 문제에 대해 이해를 도와주는 도구였을까. 후자의 경우, 일견 이 세상과는 상관없는 외계나 마법에 대한 책들이 눈앞의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로 과연 적합할 수 있는 걸까. 그 대답으로 SF 독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말을 덧붙이고 싶다. “내가 SF에 대해 항상 좋아해 온 점 중 하나는, SF를 보면 여러 일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전에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것들을 여러 각도에서 보게 된다는 거다.”
5. 추천사